안녕하세요 느루입니다!🙂
오늘은 우리 한글을 지키기 위한 열정이 누구보다 강인하고 단단했던 독립운동가!!
일제강점기에 짧게 살다간 젋은 시인이자 독립운동가!!
총이나 칼 등 무력으로만 싸우는게 독립운동이 아니란 것을 보여준 독립운동가!!
'민족 시인 '윤동주에 대해 알아볼게요
⊙ 출생
* 1917년 12월 30일
만주 북간도의 명동촌에서 아버지 윤영석과 어머니 김용의 맏아들로 출생하였다
(3개월 전 윤동주 시인과 동갑내기인 고종사촌 송몽규도 태어났다)
북간도 명동촌은 신학문과 기독교를 받아들인 선구자의 마을이었다
윤동주 시인은 28년의 인생중 14년을 이곳에서 보냈다
명동교회의 장로로 인품이 인자했던 할아버지 윤하현과 동주의 아버지, 어머니 역시 모두 기독교인이었다
윤동주 시인은 아주 어릴 때부터 유아세례를 받고 기독교 정신을 배우며 자랐다
⊙ 윤동주 시인의 모습은?
*4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기억하는 윤동주 시인의 모습 :
"누가 조금만 꾸짖으면 금방 눈물이 핑 돌았다. 친구가 싫은 소리를 해도 그랬고.."
"본래 재주 있는 아이였어요. 공부도 잘하는 축이었고요."
"그래도 어쩌다 문답할 때 대답이 막히면 금방 눈물이 핑 도는 거예요."
* 은진 중학교 시절 모습 :
밤에는 늦게까지 교내 잡지 만들고, 축구도 잘하고, 웅변대회 나가 1등 상을 받기도 했다,
옷맵시를 내기 위해 직접 재봉틀을 돌리기도 했다.
⊙ 살아오신 길
* 1925년
명동 소학교에 입학.
같은 학년에 고종사촌 송몽규, 당숙 윤영선, 외사촌 김정우, 문익환 등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문학에 남다른 재능과 관심을 보였다
* 1927년
명동소학교 5학년 때에 급우들과 함께 『새 명동』이라는 등사 잡지를 만든다
* 1931년
명동소학교 졸업.
명동소학교 졸업 후 송몽규, 김정우와 함께 명동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중국인 소학교 화룡 헌립 제일소학교 고등과에 편입하여 1년간 수학하였다.
* 1932년
용정의 기독교 학교인 은진중학교에 송몽규, 문익환과 함께 입학.
명동에서 20리 정도 떨어진 이 곳으로 통학하는 윤동주를 위해 가족 모두가 용정으로 이사한다.
* 1934년
『초 한대』, 『삶과 죽음』, 『내일은없다』등 3편의 시를쓰다.이는 오늘날 찾아 볼 수 있는 윤동주의 최초 작품이며,이 때부터 자기 시 작품에 시작(詩作)날짜를 기록하고 있다.
* 1935년
송몽규가는낙양 군관학교로 입교하기 위해 중국으로 떠났고,
문인환도 평양 숭실중학교로 편입해 전학을 갔다 이후 윤동주도 부모님을 설득해
은진중학교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평양 숭실중학교 3학년 2학기로 편입하였다
숭실학교YMCA문예부에서 내던 『숭실활천』제15호에 『공상』이 실려 그의 시가 처음으로 활자화 됐다.
오른쪽이 윤동주, 그 옆이 문익환
* 1936년
숭실학교에 대한 신사참배 강요에 항의하여 자퇴하고 고향 용정으로 돌아와5년제인 광명학원 중학부 5학년에 편입하였다
늘 새벽 2~3시까지 책을 읽고, 많은 양의 작품을 썼다
간도 연길에서 발행되던『카톨릭 소년』에 동시「병아리(11월호)」와「빗자루(12월호)」를윤동주(尹東柱)란 이름으로 발표하였다
* 1937년
『카톨릭 소년』에 동시「오줌싸개지도(1월호)」, 「무얼먹고 사나(3월호)」를윤동주(尹東柱)란 이름으로, 「거짓부리(10월호)」를 윤동주(尹東柱)란 이름으로 각기 발표.동주(童舟)라는 필명은 이 때 처음 사용했다.
100부 한정판으로 발행된『백석 시집 : 사슴』을 구할 길이 없자 필사하여 소장한다.
진로 문제로 문학을 희망하는 윤동주와 의학을 선택하라는 아버지 윤영석이 갈등하나,할아버지 윤하연의 권유로 아버지가 양보하여 문학에 진학하기로 한다.『영랑시집』을 정독하였다.
* 1938년
앞줄 좌측 윤영선, 송몽규, 김추형 / 뒷줄 좌측 윤길현, 윤동주
광명중학교 5학년 졸업. 서울 연희전문학교 문과 입학,
기숙사 생활을 시작하였고 같은 해 송몽규도 윤동주와 함께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외솔 최현배 선생에게 조선어를 배우고 이양하 교수에게서 영시를 배웠다.
=> 참담하고 어두운 민족의 현실에 더욱 눈을 뜰 수 있었다
* 1939년
조선일보 학생란에 산문「달을 쏘다(1.23)」, 시「유언(2.6)」, 「아우의 印象畵(10. 17)」를윤동주(尹東柱)와 윤주(尹柱)라는 이름으로 발표.
동시「산울림」을 『소년』3월호에 윤동주(尹東柱)란 이름으로 발표하였다
새로 연희전문에 입학한 하동 학생 정병욱(1922-1982)을 알게되어 친해지고 그와 함께 이화여전 구내 형성교회에 다니며 영어 성서반에 참석한다.
이 무렵 릴케, 발레리, 지드 같은 작가들의 작품을 탐독하며, 프랑스어를 독습한다.
1939년 11월 민족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창씨개명까지 단행하게 됐다
말을 빼앗고, 글을 빼앗고, 이제는 성과 이름마저 빼앗아 가는 상황이 되었다
* 1941년
정병욱과 함께 기숙사에서 나와 종로구 누상동 9번지의 소설가 김송의 집에서 하숙하기 시작하였다
김송과는 하숙생이 되면서 우연히 알게 된다.
연희전문학교 문과에서 발행하는 『문우(文友)』지에 「우물속의 自畵像」, 「새로운 길」을 발표하였다
요시찰인 김송과 학생들에 대한 일본 경찰의 주목이 심하여 그곳을 나와 북아현동의 전문적인 하숙집으로 들어갔다.
전시 학제 단축으로 3개월 앞당겨 연희전문학교 4학년 졸업.졸업 기념으로 19편의 작품을 모아 자선시집(自選詩集)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를 77부 한정판으로출간하려 했으나 당시 흉흉한 세상을 걱정한 주변인들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한다.
=> 당시 한글로 시집을 내는 것은 목숨을 건다는 의미일 정도로 위험한 일이었다
시집을 3부 작성하여 한 부는 자신이 가지고, 이양하 선생과 정병욱에게 1부씩 증정한다.본래 이 자선시집의 제목은 『병원』이었으나「서시(序詩)」를 쓴 후 바꾸었다."병원"은 병든 사회를 치유한다는 상징적인 의미였다.
윤동주의 도일 수속을 위해 성씨를 "히라누마"라고 창씨개명.
* 1942년
창씨개명 이후 고국에서 쓴 마지막 작품이 된 시 「참회록」을 썼다.
「참회록」
=> 창씨개명으로 인한 고뇌와 아픔을 한글로 써내려간 시
![1513 오연우 윤동주 <참회록>](https://search.pstatic.net/common/?src=http%3A%2F%2Fcafefiles.naver.net%2FMjAyMDA3MDNfMTM0%2FMDAxNTkzNzU2MTI4MjEx.X3uSSLlvuWP1p5aIASNJAlGyjtzR2q90kCL0xSb1YSEg.KrGviiDVMR30ISBZkGXkaEUs4pHEGd5e8HqHbC0qri0g.PNG%2F%25C0%25B1%25B5%25BF%25C1%25D6_%25C2%25FC%25C8%25B8%25B7%25CF.png&type=sc960_832)
일본 유학길에 올랐고 도쿄 릿쿄(立敎)대학 문학부 영문과 선과에 입학하였고 송몽규는 교토 제국대학 서양사학과 입학하였다.
「쉽게 씌어진 詩」등 이 때 쓴 시 5편을 서울의 친구에게 보냈고 오늘날 볼 수 있는 윤동주의 마지막 작품이다.
「쉽게 씌어진 詩」
=> 일본에서 쉽게 쓰여지는 시를 보며 고향에서는 독립운동하며 잡하가는 친구들과 가족들이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반해 쉽게 시를 적는 모습을 보며 적었다고 한다.
![윤동주 - 쉽게 쓰여진 시 ( 윤동주 - 쉽게 씌어진 시 )](https://search.pstatic.net/common/?src=http%3A%2F%2Fblogfiles.naver.net%2F20140222_77%2Fasb12271_1393011365893WQtHc_JPEG%2Fabf08e083110b97418a7b5159c2f55af_1376533208.68.jpg&type=sc960_832)
여름방학에 고향에 돌아왔고 동생들에게 "우리말 인쇄물이 앞으로 사라질 것이니 무엇이나 악보까지라도 사서 모으라"고 당부하며 우리말에 강한 애정을 보였다고 한다
교토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학과 선과에 편입.
* 1943년
송몽규가 교토 시모가모 경찰서에 '조선 독립운동 선동죄' 협의로 검거된다.
고향에 가려고 준비하던 윤동주도 송몽규와 같은 혐의로 검거되고 많은 책과 작품, 일기가 압수된다.
당숙 윤영춘이 교토로 윤동주를 면회하러 가서 윤동주가 일본 형사와 대좌하여 우리말 작품과 일기를일어로 번역하고 있는 것을 목격한다.
* 1944년
교토 지방재판소에서 <독립운동> 죄목으로 2년형을 언도 받았다.
송몽규 역시 같은 죄목으로 2년형 언도 받고 윤동주와 송몽규는 이후 큐슈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 마지막 이야기
* 1945. 2. 16. 새벽 (28세)
원인불명의 사인으로 갑자기 큐슈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사망.
평소 특별히 아픈 곳도 없었고, 운동을 잘했던 건강했던 윤동주는 교도소에 수감된지 1년도 되지 않아 갑자기 사망하였다
윤동주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아버지 윤영석과 당숙 윤영춘이 후쿠오카 형무소에 오게 됐고 송몽규를 면회 하였다
송몽규는 반쯤 깨진 안경을 눈에 걸친 채, 가족들도 몰라볼 정도로 피골이 상접한 모습으로 윤동주와 자신이 감옥에서 정체불명의 주사를 맞다가 이 모양이 되었다고 증언하였다.
*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8년 1월 후배 정병욱이 가지고 있던 윤동주의 필사본 시집과 여기저기 흩어져있던 31편의 시를 모아 동주의 첫 시집이자 마지막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빛을 보게 되었다
윤동주 시인은 일제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모든 시를 우리말 한글로 남겼다
⊙ 추가
*영화 : '동주' 한번 보시면 윤동주 시인의 감정에 조금 더 다가갈 수 있을거 같아요!
⊙ 출처
* 연세대학교 윤동주 기념사업회, 유튜브 '세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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