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느루입니다!🙂
오늘 알아볼 독립운동가는 적의 심장에 폭탁을 던진 이봉창 의사입니다.
[ ★ ] 독립운동가 :: 웃으며 희생하신 이봉창 의사
1901년 8월 10일 서울 용산에서 출생
⊙ 살아오신 길
![이봉창 의사 의거 85주년 기념식, 오는 8일 거행 > 정치 > 뉴스 | KBSNEWS](https://mn.kbs.co.kr/data/news/2017/01/06/3406669_GnV.jpg)
* 사업으로 크게 성공하신 아버지 덕분에 동네에서 꽤나 잘나가는 부잣집 아들이었고 별다른 어려움 없이 자랐다. 하지만 아버지께서 첩에게 집을 장만해주시고 문란한 생활로 병에 걸리셔 사업에 지장이 생기면서 점차 기울게 되었고 이후 어머니가 버는 적은 수입으로 하루하루를 버텨야 했다.
*8세 때부터 금정에 있는 서당에서 3년간 한문을 배웠지만 10살에 문창보통학교에 입학하였고 일제 식민지 교육에 따라 일본어를 국어로 배우며 일본제국 황국신민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1915년 4년간 교육과정을 마친 이봉창 의사는 가정형편상 학업을 포기하고 직장생활을 시작하였다.
- 일본인이 경영하는 '와다세이도(화전위생당)' 제과점에서 점원으로 2년간 일을 하였다.
- 이후 '무라타 약국'의 점원으로 이직하여 일을 하였다
- 일본어를 능숙하게 구사했던 이봉창 의사는 약국에서 일하며 알게 된 철도국 공무원의 도움으로 용산역에 임시 직원으로 취직하였다
==> 하지만 이후 1920년 1월 정직원이 되었고 2월과 10월에는 승진도 하였지만 일본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승급, 급여, 상여금에서 오랜기간 부당한 차별에 분노하여 1924년 4월 14일 일을 그만두었다
*일본 본토에 가면 민족적인 차별이 없고 돈도 많이 벌 수 있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고 일본으로 건너가고 싶었지만 어머니를 홀로 두고 갈 수가 없어 여러가지 단기 일을 하며 지냈다
어느날 철도국에서 알던 일본인 '후지하타'가 한국인 식모를 데리고 본토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을 듣게 되었고 그의 조카 이은임을 식모로 보내면서 이봉창 의사도 일본으로 건너갈 궁리를 하게 되었다.
이후 어머니와 조카 이은임과 의논 후 승낙을 받아냈고 11월 오사카로 건너갔다.
*오사카에 도착했지만 이봉창 의사는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일을 구하지 못하였고, 당시 조선인들이 일본식 이름을 쓰고 있는 관례에 따라 '기노시타 쇼조'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1926년 2월 오사카 가스회사 인부로 취직하게 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신분이 밝혀졌고, 병에 걸려 일감이 끊기자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이후 부둣가에서 막노동 일, '스미토모 신동소 아마가사키 출장소'의 상용 인부로 일을 하게 되지만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게 되었다.
*1928년 11월 일본 전역에 새로운 일왕 '히로히토' 즉위식이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친구들과 교토로 향했다.
당시 행사장에는 경찰들이 돌아다니며 혹시 모를 위험에 참가자들의 몸을 수색 했고 친구 2명은 이상없이 마쳤지만 이봉창 의사의 옷 주머니 안에서 한글과 한문이 섞인 편지를 발견하게 되었고 일본군은 경찰서로 데리고 갔다. 편지 내용은 사소한 것이었지만 경찰은 조사조차 하지 않으면서 9일간 유치장에 가둬두었고 이봉창은 끝내 일왕 즉위식도 보지 못한 채 혐의 없음으로 풀려나게 된다.
==> 비록 태생을 조선인이지만 황국신민으로서 살았던 이봉창의 사상을 송두리째 바꿔놓는 계기가 되었다.
*유치장에서 풀려난 이후 주변의 차가운 시선에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고 이후 노동자의 처우개선을 주장하는 정당에 들어가려 했지만 자신이 노동자이기 전에 조선사람이며 조선인에 대한 차별이 없어지려면 무엇보다 조선독립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 이러한 생각은 자연스럽게 일왕을 죽여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하지만 일본에는 이봉창 의사와 뜻이 맞는 동지나 연줄이 없었기에 억울한 감정을 누르고 다시 황국신민으로 살아가고자 마음을 먹고 그간 연락하고 지내던 조선인들과 모든 연락을 끊고 비누가게 점원으로 2년간 일본인 행세를 하며 지내었다. 이후 도쿄로 넘어가 오사카에서 사용하던 이름을 버리고 해산물 도매상점과 가방가게 외판원으로 취직했지만 이내 무단 사직을 하고 다시 오사카로 돌아왔다.
*이봉창은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조선인 박태산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고, 그로부터 중국 상해에 가면 조선인을 우대하는 영국 회사가 있고 조선독립운동을 벌이는 임시정부가 있다는 얘기를 듣게 된다.
일본에 와서 갖가지 차별을 겪었던 이봉창 의사는 조선인으로 살아가기를 결심하고 상해로 떠났다.
*막상 중국 상해에 도착했지만 언어가 달라서 일자리를 구하기도 쉽지 않았다. 이봉창 의사는 무작정 임시정부를 찾아갔다. 임시정부 사무소 직원들은 늦은 밤 찾아온 이봉창의 말투가 절반은 일본어를 사용하고. 복장과 행색 모두 일본인과 똑같아 이봉창 의사를 밀정이라 생각하고 내쫓으려 했다.
직원들과 옥신각신하는 사이 2층에서 김구 선생님께서 내려오셨고 스스로를 '백정선'이라고 소개하였고 두 사람은 처음으로 서로를 알게 되었다.
이봉창 의사가 김구 선생님에게 했던 제안은 " 나라를 위해 몸을 던질 수 있게 지도해 주십시오"였다
*같은해 3월 이봉창 의사는 다시 임시정부를 찾아가 김구 선생님과 두번째 만남을 가졌다.
김구는 이봉창에게 여러 질문을 하며 폭탄을 일본에 가지고 갈 생각이 없는지 물어보았고 이봉창도 무기만 있으면 의거를 행하겠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후 김구는 이봉창을 만나 일왕 암살 계획을 비밀리에 추진하게 되었고 둘은 짧은 시간에 서로를 신뢰하는 사이로 발절하게 되었다.
*이봉창 의사는 철공소 일을 그만두고 일본인으로 위장해 축음기 가게 점원으로 취직하였다.
이를 보고하려 임시정부 사무소에 갔을 때 김구는 그에게 폭탄과 일본으로 갈 여비를 마련할 수 있다며 거사 결심 여부를 물어보았다. 당시 이봉창은 조선사람으로서 차별받는 삶을 살아봤자 의미가 없고 조국을 위한 의미있는 일을 하고 빨리 죽는 것이 낫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당시 극도로 궁핍한 생활을 하던 임시정부였지만 김구 선생님은 이봉창 의사의 거사를 위해 해외에 사는 동포들에게 자금을 모아 당시 거액인 일본돈 250엔과 수류탄 2개를 마련해 주었다.
*그해 12월 13일, 이봉창 의사와 김구 선생님은 러시아 식당에서 저녁을 먹으며 구체적인 거사를 꾸미게 되었고 자금을 전달하고, 김구 선생님은 식사하던 중 잠시 외출한 뒤 폭탄 2개를 신문지에 싸서 이봉창 의사에게 전달하였다. 저녁식사를 마친 뒤 이봉창 의사는 김구 선생님을 따라 사진관처럼 꾸며진 곳으로 갔다
그 곳에는 벽에 태극기가 걸려있었고 수류탄 2개와 조선독립선서문이 놓여있었다
이봉창은 먼저 친형 이범태에게 보낼 독 사진 촬영 후, 김구의 요청대로 선서물을 가슴에 달고 수류탄을 양손에 들고서 기념 사진을 촬영하게 되었다. 이로써 이봉창은 '한인애국단' 제 1호 단원으로 가입을 하게 되었다.
=> 김구에게서 자금을 받아 숙소에 도착한 이봉창 의사는 큰 거사를 자신에게 맡겨준데에 감격해 잠을 자지 못했다고 한다.
![윤봉길 친조카가 말하는 이봉창 의사, 윤주 매헌기념관장 인터뷰 - 천지일보 - 새 시대 희망언론](https://www.newscj.com/news/photo/201501/272016_220853_3638.jpg)
*12월 15일, 김구 선생님과 중국 음식점에서 만나 저녁을 먹고 수류탄 사용법을 배우고서 구체적인 거사 날짜와 장소에 관해 논의했으나 이봉창 의사에게 전적으로 맡기기로 하였다.
*12월 16일, 그 다음날 거사 전 마지막 식사를 하였다. 그 후 작별 인사로 사진관에 들려 기념 사진을 남겼다.
이봉창 의사는 바짓가랑이 사이에 수류탄을 몰래 숨겨 배를 타고 중국 상해를 떠나 일본 고베로 향했다.
*12월 28일, 이봉창 의사는 신문을 보다가 이듬해인 1월 8일 도쿄 요오기 연병장에서 육군 열병식이 열리며 일왕이 참석한다는 기사를 접하게 되었다. 이날을 거사 날짜로 정했고 임시정부에 전보를 보냈다.
- 육군 열병식 : 당시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 진출에 성공한 일본 육군의 사기를 뽐내는아주 중요한 행사였다
*1932년 1월 6일, 이봉창은 열병식이 행해질 현장을 미리 찾아가 보기로 했다.
택시를 타고 가던 중에 운전수와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운전수는 자신이 열병식에 참여하러 갈 생각으로 잘 아는 헌병에게서 명함을 받아두었는데 갈 수가 없게 되었다며 이봉창에게 명함을 건네 주었다.
*행사 현장에는 예행연습이 한창이었고 이봉창 의사는 주변을 돌아보며 거사를 행할 장소를 찾았다.
하지만 연병장이 너무 넓어 일왕 가까이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을 파악하였고 일왕이 지나가는 길목에서 거사를 실행하기를 마음 먹게 되었다.
기차를 타고 일왕이 지나갈 경로인 '하라주쿠역'으로 이동했지만 경계가 삼엄해 장소를 '아카사카미츠케'로 옮기게 되었고 그곳에 도착하니 이미 한체례 일왕이 지나갔고 행사를 마친 후 다시 이곳으로 지나갈 것이라는 정보를 수집하게 되었다. 하지만 놓치게 되었고 재빨리 다음 장소로 이동하였다.
*이동중 경찰관의 입장 제한 제지가 있었으나 택시 기사로부터 받아둔 헌병의 명함을 보여주며 급히 들어갈 수 있었다. 경시청 정문 앞 잔디밭에는 많은 인파들이 모여있었다. 일왕을 향해 수류탄을 던졌고 한발은 일왕을 명중시키지 못했고, 한발은 불발이 되었다. 경찰과 헌병대는 이봉창 주변에 있던 엉뚱한 일본인을 구타하기 시작하였다. 이를 본 이봉창 의사는 자신이 주도자라며 자수하였고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전혁진의 역사 새로읽기] 이봉창·윤봉길 의사가 폭탄 던진 이유는?](https://www.yeongnam.com/mnt/file/200901/20090119.010310806560001i1.jpg)
*경시청에 연행된 이봉창 의사는 스스로 바지 주머니에서 나머지 한 개의 수류탄고 기타 물건들을 꺼내놓았다. 황족에게 위해를 가한 범죄자로서 형법으로 대역 죄인으로 분류되었다.
사건 다음날 이봉창 의사는 도쿄 나가노구에 위치한 '토요타마 형무소'에 수감되었고 총 아홉 번의 신문을 받았다. 거사 계획, 자금 출처, 상해에서의 생활, 사상이 바뀐 계끼, 임시정부와의 관계 등 질문을 통해 조사가 진행되었고 이봉창 의사는 흔들림 없이 조선 독립을 위해 거사를 행했다고 진술하였다.
*그해 9월 16일, 도쿄 대법원은 제1차 공판을 하고, 9월 30일 제 2차 공판에서 이봉창 의사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다.
* 사건 직후는?
- 1월 8일 일본 내무성은 진상조사 발표문을 냈고 신문사들도 일제히 이봉창을 비난하는 기사와 일왕이 무사함에 초점을 맞춘 기사를 냈다. 이 사건으로 당시 수상이었던 '이누카이 쓰요시'는 책임을 지고 사임을 표명하였고 관리들에 대한 징계와 문책이 이어졌다.
- 친일세력들은 일본 고위 관료들을 방문해 고개 숙여 사죄하였고, 단체로 사죄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 그동안 조선인의 일본에 대한 무력항쟁은 많았지만 일왕을 직접 대상으로 한 이봉창의사의 의거는 당시 일본 사람들을 큰 충격에 빠트렸다. 더구나 대륙 진출을 이룬 일본군의 위력을 과시하는 열병식날 사건이 터져 일본제국에게는 큰 불명예를 안겼다.
- 일본 사법당국도 이봉창 의사의 행위가 개인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임시정부의 하수인으로서 사건을 일으켰다고 평가 절하하려 노력했다.
- 국내 언론사들은 1월 9일 이후, 조선총독부의 검열과 압박 속에 이봉창의사의 의거를 매우 비난하는 내용의 기사를 실었다. 반면 해외에 있는 한인 신문사들은 통쾌하다는 기사를 내었다.
- 신문기사를 통해 사건을 접한 임시정부는 비록 이봉창의 의거가 일왕을 살해하지 못했지만 조선인 입장에서 일왕을 죽인 것이나 다름없다며 의견을 모았다.
- 임시정부 인사들이 창립한 독립운동 정단인 '한국독립당'은 이봉창 의사가 결행한 이유, 일제의 부당함 등을 담은 선언문을 발표하게 되었다. 이후 이 선언문은 중국 여러 언론사에 보도 되었고 만주사변으로 인해 증폭된 중국인들의 반일감정과 항일운동을 더욱 고조시켰다.
- 중국 언론들은 이봉창의사가 불행히 일왕을 죽이지 못해 안타깝지만 인구가 많은 중국인이 이처럼 행동하지 못해 부끄럽고, 인구가 적은 조선인이 해냈다며 연일 집중 보도했다.
⊙ 마지막 이야기
*10월 10일 이봉창 의사는 '토요타마 형무소'에서 '이치가야 형무소'로 이감되어 32살의 나이로 하늘의 별이 되었다.
*이봉창의사의 시신은 도쿄에서 멀지 않은 '우라와 형무소' 묘지에 매장되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은 이후 우리나라에서는 이봉창을 비롯해 항일독립운동 의사, 열사에 대한 추모열기가 일었다.
*1945년 12월 23일 지금의 서울 동대문에 위치한 서울 운동장에서 이봉창, 안중근 등 순국선열 추념대회가 열렸다.이후 김구 선생님은 일본에 있는 박열 의사에게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세 의사의 유해를 조국으로 봉환할 것을 의뢰하였다.
*그동안 형무소 묘지에 묻힌 이봉창 의사의 유해는 1946년 5월 15일 조국의 땅을 밟을 수 있게 되었다.
*1946년 6월 15일 부산 공설운동장에서 추도회가 열렸고 다음날 세 의사의 유해는 부산역으로 옮겨져 서울로 향했다. 지금의 종로에 위치한 '조계사'에 안치되었고, 안위식이 거행되었다.
이후 김구 선생님은 효창공원에 유해를 묻기로 확정함에 따라 미군정에 허락을 득해 7월 6일 많은 국민들의 애도 속에 국민장을 거행하였고 세 의사의 유해는 효창공원 내 잠들게 되었다.
*1962년 우리나라 정부는 이봉창의사에게 훈장을 추서했고 1996년 '이봉창의사기념사업회'는 이봉창의사의 의거를 기리기 위해 효창공원 안에 동상을 건립하였다.
![국토매일] 용산구, 이봉창 의사 기념관 건립 기본계획 수립 착수](https://gtr.xza.kr/imgdata/gtr_xza_kr/201810/86-20181025100227.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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