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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 독립운동가 : 시베리아 항일 운동의 대부 '페치카 최' 최재형 선생

by _느루 2020. 9. 26.
안녕하세요 느루입니다!🙂
독립군에 자금을 지원하고 조선 독립 운동의 발판을 마련한 인물!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지원했던 인물!!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현한 인물!!
'페치카 최' 최재형 선생님에 대해 알아볼게요



⊙ 출생 
1860년 8월 15일 함경북도 경원군 출생
노비 아버지와 기생 어머니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 최재형 선생의 모습은?
자신의 재산과 능력과 기회를 공동체에 바치면서 한인에게 존경받는 남자였다.
최재형 선생님은 황무지를 개척하며 초기 러시아 한인 사회를 이끌어 러시아 지도자로서도 존경 받은 한국인이었다.


⊙ 살아오신 길
1860년대 흉년이 들어 가난과 학정을 피해  경원군에서 러시아 (크라스키노)로 이주를 하였다.
(당시 많은 한인들이 살기 위해 연해주로 가게 되었다)

지신허 마을에 정착을 하지만  9살이었던 최재형 선생님은  형수의 괴롭힘으로 11살에 가출을 한다.
크라스키노에서 포시예트 항구에 도착을 했지만 추위와 배고픔에 탈진하여 쓰러지게 되었다.
그때 러시아 선장님에게 구조가 되었고 선장 부부는 양아들을 삼게 되었다.

최재형 선생님은 러시아 이름 '표트르 세묘노비치'와 함께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다.
 러시아에서 교육받은 최초의 고려인이기도 했다.

새어머니에게 다양한 학문을 배웠고 선장인 아버지를 따라 6년동안 배에서 선원생활을 하였고 무기 공장 노동자 등 각고의 노력 끝에 1900년대 초 러일 전쟁으로 인한 특수로 군수 산업 분야에서 큰 돈을 벌게 되었다.

능통한 러시아어와 성실하고 유능해 많은 러시아인이 최재형 선생님에게 통역, 도로, 막사 공사 하청, 식료품 등 군납을 맡겼고  한인 거주 지역 행정가로 임명이 되었다.


독립운동을 한 계기는??
태어난 나라는 일제에 빼앗길 위기에 처하였고, 러일전쟁때 현재 고국 (러시아)는 패배를 하였다.
러일 전쟁 당시 간도 관리사였던 이범윤을 만나게 되었다. => 당시 고종황제는 이범윤을 통해 러시아를 지원하였다
최재형 선생님은 이범윤 선생님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되었고, 일제를 보고 계몽하고 공부시키지 않으면 나라를 뺏길 수 있다는 생각에 독립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재러한인사회의 대표적인 지도자로 한인 마을에 학교와 교회를 세워 인재를 양성 하였고, 본격항일 투쟁을 위해 '동의회(同義會)'를 결성하였다

국방일보 모바일

동의회(同義會)
1908년 결성된 항일 의병 조직! 즉, 의리로 뭉칭 사나이들
많은 러시아 동포들에게 무장투쟁으로 국권을 되찾아야 한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조직 이후 국내진공작전을 보여주며 활약했지만 이후 많은 일본군이 투입되며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근거지를 블라디보스토크로 옮기게 되었고 대동공보(러시아 한인신문)를 운영하였다

스크랩] 잊혀진 기록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최재형 선생님은 적은 돈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였고 의열 투쟁을 하게 되었다
 (의열투쟁 : 소수 인원이 식민 통치 기관을 폭파, 침략 행위에 앞장선 일본인을 사살하는 무력 투쟁)

조선통감부 초대 통감 이토히로부미의 러시아 방문 소식을 듣게 되고, 안중근 의사를 떠올리며 거사를 준비하게 되었고 안중근 의사를 후원해 주었다.
안중근 의사의 거사 후 안중근 의사를 위해 변호사를 파견 하였고 안중근 의사의 가족들을 러시아로 데려와 보호하였다.

KBS NEWS


1910년 8월 29일 일제에 국권을 강탈 당하고 일본은 러시아를 압박한다.
계속되는 압박에 최재형 선생님은 '권업회(勸業會)'를 조직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활발히 항일 투쟁을 하였다.

1911 연해주 지역 독립운동기지 (권업회, 대한 광복군 정부, 대한 국민의회) : 네이버 블로그

* 권업회 (勸業會)
'상업을 증진시키는 모임' (겉모습)
한인 동포에게 실업을 권장하고 일자리를 소개하면서 교육보급을 표방한 단체.
회장 최재형, 부회장 홍범도 체제로 출범한 권업회는 1914년 강제 해산될때 회원이 8,579명에 이르렀다.

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 이후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만들어지게 되었고 최재형 선생님은 임시정부 재무총장으로 임명 되었다.


⊙ 마지막 이야기
1920년 4월 4일 밤, 일본은 러시아 한인 거주 지역을 기습하였다
최재형 선생님은 한인들의 피해사실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지만 러시아 혁명세력까지 무장해제된 상황에서 일본군의 기습 공격을 막을 수 없었다.
당시 연해주 지역 동포 5,000여명이 사망하였다 => 일명 연해주 참변

최재형 선생님은 결국 1920년 4월 5일 아침 일본 헌병대에 의하여 체포 되었다.

최올가 (최재형의 다섯 번째 딸)의 일기
아버지는 "만약 내가 숨는다면 일본군들이 잔인하게 너희들에게 복수할 것이다. 나는 살만큼 살았다. 차라리 내가 잡혀가는 것이 낫다"라고 말하며 도망가라고 권하는 가족들을 설득했다.  결국, 아버지는 4월 5일 아침에 들이닥친 일본 헌병대에 의하여 체포됐습니다.

일본군은 독립 운동에 가담한 76명의 조선인을 체포하였고 그중 독립 운동을 주도한 최재형 선생님, 김이직 선생님, 황경섭 선생님, 이경수 선생님 4명의 애국 지사를 처형하였다.
그렇게 최재형 선생님은 하늘의 별이 되었고 그 유해는 아직까지 어디 있는지 모른다....

연해주를 중심으로 확장해가던 독립군도 치명타를 입게 되었다.

[여행] 러시아 블라디보스톡 여행 1일차-고려인 문화센터(식당) / 안중근 의사 기념비 / 4월 참변 추모비 / 우수리스크 기차역 / 블라디보스톡 기차역 / 장보기


⊙ 추가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우수리스크에 위치한 독립운동가 최재형의 옛 집이 독립운동기념관으로 지정되었다.
캐나다 한국일보 : 독립운동가 최재형 기념관 개관연해주 독립운동 대부 최재형 선생 기념관, 28일 개관 - 통일뉴스


연해주 지역을 가면 아직 최재형 선생님을 기억하는 분들이 많다고 하는데 우리나라는 최재형 선생님의 업적에 비해 너무 알려진게 없어서 속상하네요😞 많은 분들이 이 글을 통해 조금이라도 이분을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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