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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독립운동가 ::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장! 석오(石吾) 이동녕

by _느루 2020. 9. 6.


안녕하세요 느루입니다!🙂
오늘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수장이었고
백범 김구선생께서 존경하셨던 인물!!
이분이 안계셨다면 현재 대한민국이 없었을지도 모르는 중요한 인물!
많은 업적과 훌륭한 인품을 가지고 계셨지만 많이 알려지지 않은 인물!!
석오 이동녕 선생에 대해 알아볼게요!


[ ★ ] 독립운동가 :: 석오(石吾) 이동녕 선생



⊙ 출생 

1869년 9월 2일 충남 천안 목천읍 동리에서 의성군수 등을 지낸 교육자였던 연안 이씨 이병옥의 장남으로 출생


⊙ 석오(石吾)

자호로서 지조와 겸손을 의미하며, 그 뜻이 돌과 같이 단단하고 어떠한 유혹에도 흔들리지 아니함을 의미한다


⊙ 이동녕 선생의 모습은?

* 7세에 천자문을 익히는고 10세 때 이미 사서삼경을 통달하는 등 매우 총명하고 인품도 자애로웠다.

* 청소년기에 부친이 경상북도 영해군수로 부임하여 그곳에서 지내면서 출세니 양반이니 하는 특권의식을 거부하고 민중과 함께 하는 생활이 인간다운 생활이라 생각하면서 개화 의식에 스스로 눈을 떴다.

* "벼슬이란 때가 되면 하게 마련이고 스스로 추대 받아야 신명이 나는것이다. 벼슬은 남의 머리에 있는게 아니고 남의 발아래 있다는 자세로 임해야 한다. 벼슬은 곧 봉사, 심부름꾼이라느 생각을 버려서는 아니 된다." 이처럼 석오는 고위 관리직을 스스로 원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고, 벼슬하기 위해 동분서주 한다던가 남을 중상 모략하는 일은 그의 사전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 워낙 인자하고 다정다감한 인품이라 사람을 잘 다르우었고 다른 사람들을 공경하기를 즐겼다. 좋은 일은 언제나 앞장서서하되 그 공로와 명예는 모두 다른 사람에게 돌렸다.

* 공직에 오를 때마다 의회를 떠나도 좋으니 지위는 사양하겠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 "동포여 우리나라가 온전한 자유를 누리며 굳건한 독립을 찾는데 하나는 내 동지들의 단결이오. 둘은 우리 동포들의 단결이며 셋은 모든 대한민족이 대동단결함에 있으니 오로지 뭉치면 살고 길이 열릴 것요, 흩어지면 멸망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대동 단결을 강조하셨다

임시정부 국무위원들(중국 치장, 1935. 11. 7)


⊙ 살아오신 길

1) 민족 교육의 선각자

어록 : "지식이 결여하고 애국심이 박약한 이 국민으로 하여금 나라가 곧 제 집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전에는 아무 것으로도 나라를 건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1883년 24세가 되던 행에 응제 진사시험에 합격하여, 사회에 첫걸음으 내딛게 되고, 겸손과 격려의 뜻으로 자신의 호를 "석오(石吾)"라 칭하였고 부친이 운영하던 광명학교로 육영사업에 협조 하였다.

*1894년 풍산 김 씨 김경선이라는 아리따운 여성과 혼인

*얼마 후 첫아들을 낳은 선생은 서재필, 윤치호, 이상재 등이 조직한 독립협회에 가담하여 간사원을 맡아 일하면서 개화민권운동에 깊은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또한 선배 동료들을 도와 국가의 실정을 규탄 성터하며 외국으로 넘어가는 각종 국가의 이권을 고수하면서 자체적인 개발을 강조하였고 그 다음해부터 독립협회 회원들이 늘어나면서 각계각측을 포섭 망라하여 민권민생 투쟁을 벌였던 "만민공동회" 운동에도 참여, 적극적으로 앞장서기에 이르렀다.

* 1890년대 후반부터 구국 운동에 본격적으로 합류
제국신문의 사장이었으며 이종일(3.1독립만세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분)을 찾아가 제국신문에 사설을 집필하기 시작 했다. 9월 25일자 "민족자강지방도"와 10월 28일자 "위국지방도"는 유명논설로 꼽혔고 이후 수년간 집필생활을 통해 민족사상을 정립하였다.

* 선생은 학교를 세워 계몽과 인재 양성에 힘을 쓰고자 했다.
상동교회의 전덕기 목사로부터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고 마음의 구세주로 섬길 것을 결심한 뒤, 교회 안에 상동청년학원(중학교)을 설립하여, 오갈데 없는 청소년들에게 배움의 장을 마련해 주었다.

▶ 첫 교육기관 '상동청년회'는 초기에는 신앙단체에 가까웠지만 1900년대 대표적 항일운동가이자 계몽운동가인 전덕기가 전도사로 와 1903년 상동청년회를 재건하고 정치활동과 구국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 선생은 상동청년회에서 공옥학교와 상동청년학원 설립에 참여했는데, 공옥학교는 초등 교육기관으로 1896년 설립하여 성경과 영어를 가르쳤고, 1905년 정식 개학한 중등교육기관 상동청년학원에서도 국사, 외국어 교육, 군사훈련 및 신문화 수용과 전파 등을 담당했고 한글 보급운동을 전개 했다.

▶ 이후 일제의 강한 항의와 정교분리 원칙을 내세운 선교사들에 의해 1906년 해산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선생은 동지들과 손잡고 결사대를 조직한 뒤, 일제의 야만적인 침략행위를 규탄하였으나 대한문 앞에서 일본 경찰에 연행되어 투옥되고 말았다.
이듬해 감옥에서 풀려난 뒤에는 북간도에 가서 교포들을 위한 교육에 전념하였다

*두 번째 교육기관인 '서전서숙'을 설립

서전서숙은 1906년 10월 이상설과 함께 만주지역에 세워진 최초의 민족교육기관으로 북간도 용정에 세워졌고, 간도에 있는 한국인 자제에게 교육을 통해 독립 사상을 고취할 목적으로 학교를 설립 하였다. 또한 일제에 농토를 빼앗긴 조선인들의 새로운 생할근거지가 되었다.

* 동지 중 한명이던 이상설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한국대표로 떠나자 1907년 선생은 일시 귀국하여 양기탁, 전덕기, 이동휘,이갑, 유동열, 안창호, 김구, 이종일 등 20여명과 함께 서울에 비밀결사 신민회를 조직하였다.
여기에 선생은 총서기라는 직책을 맡아 신민회의 실질적인 운영 및 정책의 수립과 방략을 설정하는 등 주도적으로 활동하였다.

신민회는 우리나라 처음으로 체계있고 조직화된 지하 항일단체이며, 5대 악법으로 자유가 통제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비밀로 진행되었으며 회장으로 윤치호가 부화장으로 안창호가 있었다.
▶ 국내에서는 오산학교와 대성학교 등 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운동을 벌였고, 평양 자기회사나 방직공장 등을 열며 식산 흥업에도 힘썼다.또한 태극서관설립, 조선광문회 조직, 대한매일신보 발간문화사업도 진행하였다.
▶ 국외에서는 선간도에 신흥강습소를 설치하는 등 독립 운동 기지를 건설 하였다.
하지만 안악 사건 (안명근 사건)과 105인 사건으로 해산 된다.



2) 독립군 양성
신흥무관학교 개교기념일

* 계몽운동의 보람도 없이 1910년 일본에 강제로 나라를 뺴앗기는 비운을 맞게 되었고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 말겠다는 굳센 다짐을 했다. 그리하여 원산에 계신 부모님께 하직서를 띄우고 가산을 정리, 그해 겨울 신민회 회원들과 서간도로 망명하였다.

* 1911년 6월 서간도에서 이회영 형제들과 함께 경학사라는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하고 이 단체를 중심으로 신흥강습소를 설립(훗날 신흥무관학교로 확대 재편 됨)하였다.

신흥(新興)이라는 명칭은 신민회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신'자와 다시 성대하게 일어나는 독립운동 기구라는 의미의 '흥'이 결합되어 만들어졌다. 단속과 탄압을 피하기 위해 신흥강습소 또는 신흥중학교라고도 불렸다.

이 때 선생은 초대교장으로 군사 교육과 독립정신 고취에 헌신하였다.
"청년을 길러야만 그것이 곧 국가의 힘이 될 수 있다"는 일념으로 인재육성과 독립군 기지 개척을 꾀하면서 신흥 강습소를 한국 독리운동의 요람지로 만들었고, 직접 팔다리를 걷고 황무지를 일구어 야산을 개척하면서 서간도에 동포들의 생활기반을 마련하였다. 

*하지만 개교 초 농사의 흉작으로 재정난에 봉착한 신흥강습소가 신민회에서 보내오기로 한 자금도 일제의 조작에 의해 오지 못해 재정난에 허덕이다가 1912년에 한인 자치단체인 부민단을 결성하고 독립군 양성을 적극 지원하고 나섰다.

1912년 7월 새롭게 신축해 낙성식을 가졌고, 무관학교 틀을 갖추게 되었다. 1919년 3.1운동에 한 단계 더 다가가는 도약의 기회가 되었고 1919년 4월 한족회가 설립되면서 다수의 청장년들을 독립군으로 양성키로 하고 이에 명칭도 신흥무관학교로 하였다. 1920년 폐교가 될 때까지 이곳에서 교육을 받은 3천 5백 여명의 청년들은 그 후 독립군의 초석이 되었고 후일 청산리대첩 등 항일 무장투쟁의 주역이 되었다.

시간이 갈수록 일제의 간섭이 심해지자 선생은 다시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과 니콜리스크 등으로 망명하여 단군을 신봉하는 대종교에 입교, 단군을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로 삼기 시작하였다. 
이상설과 함께 광복군정부를 결성했지만 제1차 대전이 발발함에 따라 연해주와 만주 일대에서의 독립운동은 사실상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대종교를 중심으로 민족의식을 고양하면서 연해주와 만주 일대에 흩어진 항일 민족역량을 한데 모으며 결전의 시기에 대비해 갔다.

*1918년 제 1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후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주장함에 따라 우리나라도 독립의 기대에 부풀어 평화와 자유를 애호하는 전 세계 민족 앞에 호소할 독립선언서를 작성에 참여한다.

1919년 초에는 조소앙, 김좌진 등 민족 대표 39명과 함께 길림성에서 <대한독립선언서>
"한국이 완전한 자주독립국이고 민주의 자립국이라는 것을 선언하고, 한일 합병은 일본이 우리나라를 사기외 강박 그리고 무력 등의 수단을 동원하여 강제로 병합한 것이므로 무효라고 주장하였다." 를 발표하였다.

1919년 3.1운동의이 일어나자 3.1운동의 건국정신을 이어받아 민주정부를 세워서 민간 지도자가 책임을 지고 나라를 이끌어가야 한다는 민주공화체제를 도입, 실시하고 곧바로 상해로 건너갔다.석오는 군왕이 정치하던 시기는 지났고 왕실은 국제 경쟁력을 약화시킨다고 믿고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세우기 위해 발길을 재촉했다.


3) 대한민국 임시정부

* 선생은 동지들에게 "무엇보다도 3.1혁명 이후에 우리가 할 일은 세계혁명 이후에 상식적으로 나타나는 임시정부를 우선 수립해야만 빼앗긴 조국을 우리 손으로 직접 찾을 수 있다."고 열변을 토하며 임시정부 수립을 주장했다.
프랑스 조계 안에 있는 보창로 329호에 독립임시 사무소를 설치 운영하였는데, 정부를 수립하기위해서는 먼저 입법기관인 의회를 설립하는 일이 급했다.  동지들을 이끌어 가는데 남다른 인화력과 설득력을 지니고 있었기에 최초 설립된 국회적 성격의 임시 의정원의 초대 의장으로 선출 되었다.

*임시정부는 이때부터 3권 부립의 민주공화체제의 순수 민간정통정부로서 균형있는 광복정책을 펴나가기 시작했다.
임시정부는 국무원과 의정원 그리고 사법부로 구성되어 최초로 민주공화정의 3권분립 제도를 갖게 된 것이다.
석오는 또한 초창기 임시정부를 통치해 가는데 필요한 헌법 10개 조항을 만들었다.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 1조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제로 한다 (변함없이 지금의 대한민국 헌법까지 이어지고 있다)
제 2조 대한민국은 임시정부가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의항 차를 통치한다
제 3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 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없고 일체 평등하다
제 4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신교 언론 저작 출판 결사 집회 신서 주소 이전 신체 및 소유의 자유를 가진다
제 5조 대한민국의 인민으로 공민 자격이 있는 자는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있다
제 6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교육 납세 및 병역의 의무가 있다
제 7조 대한민국의 신의 의사에 의하여 건국한 정신을 세계에 발휘하며 진하야 인류의 문화 및 평화에 공헌하기 위하여 국제연맹에 가입한다
제 8조 대한민국은 구황실을 우대한다
제 9조 생명형 신체형 및 공창제를 전부 폐지한다
제 10조 임시정부는 국토회복 후 만 1개년 내에 국회를 소집한다

대한민국 100주년을 맞이하여 새로운 백년은 진정한 독립을 쟁취해야 -제헌절은 임시헌장 제정일인 4월 11일이나 임시헌법제정일인 9월 11일로 변경해야

*그 당시 국내외에는 여러 임시정부가 구성되어 있었으나 상해 임시정부, 러시아 대한민국의회, 서울의 한성 임시정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부실한 상황이었다. 이에 선생은 대한민국을 대표할 임시정부는 하나만 있어야 되겠다는 의지에 따라 5개월에 걸쳐 상해와 러시아 서울 3개처의 임정대표가 모여 타협한 끝에 제1차 개헌을 통해 단일통합정부를 구성하였다. 의정원 의장직은 손정도와 홍진 등에게 맡기고 석오는 단일통합정부의 실질적인 운영자인 내무총장 일을 전담하였다. 이승만이 사임하자 그 뒤를 이어 대통령이 직무를 대행하였으며 국무령 국무위원회의 주석 등의 요직을 맡아 임시정부의 위기를 지혜롭게 극복해 나갔다.

* 환갑을 맞은 석오 이동녕 선생은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하는 민족주의 세력들과 함께 한국 현대사에서 정당 정치의 기원이라할 수 있는 "한국독립당"을 조직하고 초대 이사장으로 선임되었다. 그는 임시의정원 의장이자 국무의원으로 김구의 한인애국단 활동을 도와 이봉창 의사와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적극 지원하였다.이로 인해 임시정부는 일제의 탄압을 받게 되고 중일 전쟁의 반발과 함께 상해를 떠나 항주 -> 진강 -> 장사 -> 광주 -> 유주 -> 기강으로 피난처를 옮겨다니며 임시정부를 유지하고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한인애국단
▶1931년 10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으로 있던 김구에 의해 세워진 일본 제국의 주요 요인 암살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독립운동 조직 

▶1932년 이봉창의 의거 (사쿠라다몬 사건), 윤봉길의 홍커우 공원 폭탄투척 사건, 유상근, 이덕주의 다롄 폭파 사건 등을 지도하여 일본 제국의 식민 통치에 대항하였다.

사소한 포스팅) 각시탈 속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
김구, 신건식, 이동녕, 엄항섭


⊙ 마지막 이야기

일화) 1940년 치장현에서 열린 3.1절 기념식이 있어 임정 식구들과 함께 참여 후 돌아오는 길에 다 같이 외식을 하자고 권하셨고 그날 저녁부터 그는 밤새 앓다가 열흘 동안 곡기를 끊고고 같은달 생을 마감하셨다.

* 임정의 국무총리, 주석 등을 역임하던 석오는 1940년 3월 13일 중국 기강에서 광복을 보지 못하고 지병인 폐렴으로 하늘의 별이 되었다.

* 그는 숨을 거두기 전에 다음과 같은 당부의 말을 하였다.
"빼앗긴 조국은 반드시 우리 손으로 찾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단결하고 화합하여 국력을 키워 나가야 효과가 있는 법이다. 부디 파벌을 없애고 지역감정을 해소하고 진정시키며 내편이 아니면 못 믿는 풍토도 속히 개선 되어야 이 나라는 영원히 번영할 것이다."
석오 이동녕 선생은 애국사상이 그 누구보다 강했고 지조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겼다.

* 백범 김구는 석오 이동녕 선생을 최고의 스승으로 섬길 만큼 선생에 대한 존경이 대단하였다.
석오 이동녕 선생의 국상 애도 문에서 "나라의 형세가 기울어짐을 당하여 조국의 치욕을 참시쾌설치는 못하였을 지라도 선생의 위대한 혁명정신은 더 영원하고도 완전한 조국독립과 민족자유의 싹이 되었으며 선생의 40년 동안 일관한 혁명정신이 담긴 유지를 완성할 것을 확신하나이다" 라고 업적을 기리며 애도하였다.
석오의 장례는 5일장으로 치러졌고, 김구의 주선으로 석오의 유해가 고국으로 환국 되었고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추서 되었다.


⊙추가
*이동녕 생가지는 충청남도 기념물 제72호입니다

*석오 이동녕 기념관도 있습니다

천안시 석오 이동녕 선생 생가  & 기념관

* 석오 이동녕 선생 선양회
==> 홈페이지 : http://leedongnyeo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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