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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독립운동가 :: 매국노 이완용을 처단하라!!! 이재명 의사

by _느루 2020. 9. 12.
안녕하세요 느루입니다!🙂
오늘은 이토히로부미 하면 안중근 의사!
이완용 하면 떠올라야 하는 이재명 의사!에 대해 알아볼게요!


[ ★ ] 독립운동가 :: 매국노 이완용을 이재명 의사

한국인물)수길 이재명 의사(李在明, 1887~1910)(생애 및 업적,발자취,평가) : 네이버 블로그


⊙ 출생 
1887년 10월 평안북도 선천군 출생




⊙ 살아오신 길

* 평안남도 평양으로 이주하여 개신교계열 사립학교인 일신학교를 졸업하였다.

* 1904년 하와이로 노동 이민을 떠나게 되었다.

* 해외에서 활동하던 한인의 독립운동 단체인 공립협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공립협회 : 1905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설립된 항일 단체
이강, 안창호, 송석준, 정채관, 임준기


왼쪽에서 두번째

이재명 열사는 을사늑약과 한일신협약 체결에 관한 뉴스를 듣게 되었고 울분을 토하며 매국노 숙청을 결의하게 되었다.
고종은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알리기 위해 헤이그에 특사를 파견 하지만 일제의 방해로 회의 참석을 거부 당하게 되었고 일본은 1907년 7월 이를 계기로 고종을 강제 퇴위하고 군대까지 해산 당하게 되었다.
이재명 열사는 하와이로 떠난지 3년만인 1907년 10월 미국을 출발해 귀국하였다.

*1909년 1월 이토히로부미 제거 계획을 세웠지만 순종의 안전을 염려한 안창호의 만류로 다음을 기약하게 되었다.

1909년, 20살 청년 이재명은 이토히로부미의 러시아 방문 소식을 듣고 처단을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갔고 이동 중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처단했다는 감격적인 소식을 듣게 되었다.

곧 다시 귀국을 한 그는 이동수, 김정익 등과 함꼐 친일 매국노 이완용, 송병준, 이용구 등의 암살을 계획하고 기회를 기다렸다.

<이완용을 결정한 수 많은 이유 중 몇가지>

1. 고종을 협박해 조선의 외교권, 즉 주권을 일본에 넘겨주겠다는 을사늑약을 체결과 서명을 주도 하였고,  총리대신 자격으로 참석하여 문서에 서명을 하며 나라의 주권을 잃게 만드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이토히로부미마저 이완용의 도움으로 을사조약을 체결했다고 할 정도였다고...

2. 1907년 헤이그특사 사건 이후에 일제보다 더 강력하게 고종의 퇴위와 일본인도 조선의 관리가 될 수 있다는 차관정치, 사법권과 경찰권을 일본이 가져간다는 성미7조약 체결 등을 주도 했으며, 당시 건국에서 일어난 무상의병투쟁에 대해 강력히 대응을 해달라고 일제에 요청하기도 했다

3. 1909년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당했다는 소식에 안중근을 맹비난하고. '이토는 나의 스승'이라며 그의 죽음에 통곡했다고 한다. 그리고 1910년 한일병합조약을 순종 황제의 허락도 받지 않은 채, 체결함으로써 대한제국을 멸망케 함과 동시에 36년간의 일제치하 암흑기로 만들었다

4. 헌병보조원제도 : 1907년~ 1945년  한민족을 탄압할 목적으로 만든 제도,
즉,  조선인을 헌병보조원으로 채용( 앞잡이로 내세워) 이후 일본 헌병을 도와 항일 의병을 토벌하게 만들었다.
ex) 노덕술(악명 높았던 친일 형사), 하판락(고등계 경찰, 고문귀신)

이외에도 1919년 3.1운동을 폭동으로 간주하고 그 해결책을 구체적으로 일본에 제안하기도 했다.
조선인 귀족을 모아놓고 "천황폐하 만세"를 외쳤고, 충성을 대가로 귀족 자리를 받았으며 그가 죽을때 친일행각으로 일본에게 받은 돈으로만 300만원 (현재 600억원정도, 당시 조선에서 두번째 갑부였을 때)에 달했으나 그는 단 1원도 사회 공헌을 위해 쓰지 않았다. 그는 죽은 후 일본 왕실에서 두번째로 높은 대훈위국화대수장을 수여 받았다 (왕족을 제외하면 이완용이 유일했다)


의거가 있기 전 이재명 의사는 김구 선생을 찾아갔다.
김구 선생님과 노백린 장군이 함께 계셨는데 준비한 권총과 단도를 꺼내 보이며 김구 선생의 허락을 구하였다.
하지만 나라를 위하는 애국심과 용기는 가상하나 목숨을 바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라 두 분 다 거사를 반대하였다. 
(당시 이재명 열사의 나이는 21살 이었다.)
=> 이재명 의사가 권총과 칼을 반납하지만 얼마 뒤 이완용 살인미수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1909년 12월 22일 명동 천주교 성당에서 있을벨기에 황제 레오폴트 2세의 추도식에 이완용이 참석한다는 신문 보도를 접하고, 군밤장수로 가장하여 성당 문밖에서 기다리다가 식을 마치고 나오는 이완용을 찔렀고 이완용은 쓰러지고 이재명은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뒤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이재명의사 의거터선을 넘는 녀석들 친일파 종류 아관파천 이완용 친일 배경 이재명 의사


이완용은 폐가 뚫리고 늑간동맥이 절단 되어 과다 출혈이 있었다.
하지만 일본 외과계 최고 권위자가 당시 대한의원(서울대병원) 원장으로 부임해 있었고 최신 의료기술이 총동원되어 살아나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첫 흉부외과 환자) ....하...


⊙ 마지막 이야기
당시 이완용 살인 미수로 사형이 어렵다고 판단되어 당시 인력거 꾼이었던 박원문이 현장에서 사망한 것을 빌미로 박원문 살해 혐의까지 추가되었다
이에 일본 변호사 세 사람은 이에 반박하였지만 묵살 되었고 1910년 5월 1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이에 일본 판사를 꾸짖으며 당당히 얘기했다
"공평치 못한 법률로 나의 생명을 뺴앗지만 국가를 위한 나의 충성된 혼과 의로운 혼백은 가히 빼앗지 못할 것이니, 한 번 죽는 것은 아깝지 아니하거니와 생전에 이룩하지 못한 한을 기어이 설욕하리라."

역사 속 숨은 영웅] "나는 당당하다" 매국노 이완용을 칼로 찌른, 이재명 - 조선일보


1910년 9월 30일 여러번의 상고요청은 기각되었고 경성감옥에서 교수형이 집행되어  23세의 나이로 하늘의 별이 되었다.
순국 직전에 "나는 죽어 수십만명의 이재명으로 환생하여 기어이 일본을 망하게 하고 말겠다!"란 말을 남겼다고 한다.

이재명 의사가 사형 당한 후 시신수습을 어떻게 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의거터의 작은 표석에는 그의 이름과 그 날의 일이 세겨져 있다.

2019년 7월 한국사 시대순 체험학습(일제강점기) 1회 수업_서대문형무소역사관


⊙ 추가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2001년 12월, 대한민국 국가보훈처에 의해 이 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다
박상우 작가의 장편소설 <칼>은 당시의 의거를 소재로 해 쓰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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